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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단편소설.

오래된 일기
p.13
나를 변호하는 목소리는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 불합리한 재판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죄책감이 엷어지지 않을까, 하고 은근히 기대해보았지만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의 법정에서는 시간도 내 편이 아니었다. 시간은 오히려 나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다.
p.18
뜻밖의 일이 불쑥 끼어들어 삶의 중요한 부분을 결정해버리곤 한다. 끼어든 것들이 삶을 이룬다. 아니, 애초에 삶이란 게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일찍 끼어드느냐 늦게 끼어드느냐 하는 문제만 있을 뿐이다. 끼어드는 것이 없으면 삶도 없다.
p.29
일기장이 제공하는 자유는 일기를 계속 쓰는 것을 담보로 주어진 것이었다. 묶음을 조건으로 한 해방, 해방의 지속을 위한 묶음이었다. 해방되었으므로 묶어야 했고, 해방을 반복적으로 얻어내야 했으므로 반복적으로 묶어야 했다. 어느 순간 그것은 운명처럼 받아들여졌다.
무슨 일이든, 아무 일도
p.58
흔들리던 어항과 화분과 액자와 의자와 책상과 식탁과 옷장이 그의 몸을 눌렀다. 나중에는 그들의 집이 그 위에 얹혀졌다. 집이 들러붙어 있는 땅과 땅에 담긴 물과 물에 붙은 하늘이 상규의 몸에 붙었다. 온 세상이 그의 등에 업혔다. 온 세상이 그를 짓눌렀다. 상규는 그 모든 것을 등에 짊어진 채 끙끙거렸다. 끙끙거리면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갔다.
p.60
난폭해진 남자의 뜨거운 몸 아래서 그녀는 어렴풋이 자신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용돌이의 실체를 감지했다고 느꼈다. 그녀는 몸의 긴장을 풀고 팔을 벌리고 다리를 뻗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녀는 긴 목구멍을 거슬러올라온 한마디의 문장을 힘들게 뱉어냈다. 집이 흔들려.
p.61
세상은 불안한 채로 잘 굴렀다. 무슨 일이든 일어났지만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도 했다.
타인의 집
p.70
말하자면 그런 유의 비범한 일들이 간혹 일어나는 데가 인생이긴 하다. 잠재의식 속의 기억은 표면에 떠오를 때까지 단순히 잠재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표면에 떠오르기 위해, 혹은 표면에 떠오를 적절한 순간을 기다리며, 고대하며 잠재해 있는 것이다.
p.91
"자신의 생명을 조금씩 떼어내서 하루씩 삶을 연명하는 거랍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삶을 내놓아야 하는 거지요. 그것이 인생이에요. 떼어낼 것이 없어지면 삶도 멈추는 거겠지요".. 그는 떼어낼 것이 없으면 삶도 멈춘다는 노인의 말이 신경쓰였다. 그 말은 뚜렷한 근거는 없는 채 불길한 예언처럼 들렸다.
P.98
외로움 속에 있는 한 인생은 결국 통속할 수 없는 거지. 잡지의 표지가 외로울 수 없는 것처럼 인생 역시 통속할 수 없는 거지.
(..누구나 외로움 속에 있기에 그 누구의 인생도 일반화 될 수 없다)
전기수 이야기
p.105
고드름장아찌처럼 밍밍하고 정연한 내 일상이란 것이 실은 공허의 구멍에 다름아니었던 거지.
p.111
짜증이 나려고 했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벌써부터 상대방의 관심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내 무의미한 행위로부터 심한 무력감과 모욕감을 느끼고 있었거든. 짙은 색안경을 쓴 남자에게 일방적으로 속마음을 간파당하고 있는 것 같은 불편함이 내가 느낀 무력감과 모욕감의 내용이었을 거야. 색안경은 간파당하지 않고 간파하기 위한 훌륭한 도구지.
p.116
우리 머릿속에 있는 이야기는 하나의 이미지 덩어리로 존재하지. 그것을 이야기로 풀어낸다는 것은 그 이미지에 육체를 부여하는 과정이야. 자잘한 세목의 연쇄가 이야기 - 육체이기 때문이지. 덩어리인 이미지를 세목으로 잘게 분리한 다음 사슬로 잇듯 일일이 연결해야 해. 그것이 누군가에게 어떤 이야기인가를 할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과정이야. 세목들은 일차적으로는 기억 속에서 불러내져야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때는, 즉 기억이 제기능을 수행하지 않을 때는, 지어내기라도 해야 하지. 지어내는 일이야 말할 필요도 없고, 기억을 재생하는 것 역시 보통 노역이 아니라는 걸 그 때 알았어. 나는 거의 탈진상태였지.
p. 126
인생이란 외롭지도 않고, 잡지의 표지처럼 그저 통속할 뿐인데 말이야. 하긴 나중에는 그 기다림이란 게 그다지 절실하지도 않고, 그저 습관에 지나지 않는 게 되었겠지만. 잡지의 표지가 인생을 닮아 통속하다는 걸 그가 왜 몰랐겠어. 잡지의 표지가 외로울 수 없는 것처럼 인생 역시 통속하지 않을 수 없는 거지.
p.127
그가 자기 이야기를 다 끝냈을 때, 이런 생각이 들더군. 그가 기다린 것은 그를 불러줄 누군가의 목소리가 아니라 자기 목소리가 아니었을까. 그는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닐까. 그가 기다린 것은 기다리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p.128
누군가에 의해 말해지지 않으면 도무지 알 길이 없는, 길고 어둡고 놀랍고 뜨거운 이야기들이 우리의 삶의 지표면 아래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돼. 그 양반, 나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얼마 있지 않아서 숨을 거뒀으니까 그게 일종의 고해성사였을 거야.
이 이야기를 지금 와서 다시 되뇌이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싶기는 하다. 하지만 한번쯤은 짚고 가야하지 않나라는 책임감이 나를 항상 짖눌렀다. 말하는 이보다 어렵고 듣는 이보다 어려운 것이 들은 이야기를 다시 말하는 일이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빠지고 왜곡된 것이 많을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기억을 되짚어 '그 사건'을 회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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