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 도서
정미경_나의 피투성이 연인
사적인 기록
2023. 5. 23.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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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 너무 재미있어서 놀란 책. 다양한 사랑이 담긴 단편소설이다.

P33
언제부터 인가 유선은 제 몸을 긁고 있었다. 젖가슴 아래쪽부터 가려워 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제 가슴을 긁고 있는 줄을 몰랐다. 가려움은 가슴속의 분노처럼 처음엔 미약하게, 나중엔 스스로 걷잡을 수 없이 그렇게 폭발했다. 왼손을 옷 속으로 집어넣어 배를 긁어 대며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37
그를 향해 전화기를 집어 던질 수도, 얼굴에 손톱자국을 낼 수도 없는 곳에 존재하는 사람에게 분노를 느껴야하는 자신. 분노를 폭발시킬 상대는 존재하지 않는데 살갗이 벗겨지도록 제 살을 긁어 대야만 하는 자신만이 혼자 남아 있었다.
51
"일기를 쓸 때 사람들은 누군가가 볼 것을 무의식 속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 말하자면 일기란 어떤 면에선 자기 검열을 이미 거친 글이야. 난 그런 거 같아"
64
유선은 누군가에게 이 속을 꼭 한 번은 열어 보이고 싶다. 사람 없는 갈대숲을 맨발로 달려가 갈라진 벌판을 갈대 뿌리 틈으로, 나는요, 하고 소리 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그러나 지워 버린다. 개인적인 고통을 증언하는 건 스스로 모자란 사람임을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 없을 것이다.
**
모두가 마음 속에 속 시원하게 뱉지 못하고 앓는 응어리가 있다. 목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화를 꾹꾹 다시 집어 삼킨다. 그렇게 속앓이를 하나보다. 매일 크게 소리치고 싶다. 그치만 그냥 한번 더 참는다. 크게 소리치면 주체하지 못할까봐. 그리고 그런 장소도 없고, 기회도 없지.
알몸으로 밖을 돌아다녀보고 싶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옷을 다 벗고 풀 숲을, 물 속을 떠다니고 싶다.
폭우가 내리는 지금, 옷을 다 벗고 비를 맞고 싶다.
시선은 참 무섭다.
68
유선은 눈을 감는다. 질투란 팽팽한 세 개의 힘에서 나온다. 하나가 없어진 지금 질투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 정서는 다만 외상일 뿐이다.
**질투란 팽팽한 세 개의 힘에서 나온다니. 너무 재밌다. 그렇지, 맞다.
77
아직은 잎이 무성한 숲이 거대한 여자의 음부 같다. 순식간에 숲의 한가운데로 내리꽂히는 번개는 여자의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기운 센 사내를 떠오르게 한다. 절박하고 집요하다. 천둥소리는 하늘이 아니라 숲이 내지르는 신음 소리 같다. 내리꽂히는 번개와 젖은 숲이 오래 그리워했던 연인처럼 서로의 품속으로 겹겹이 허물어진다. 유선은 홀린 듯 비 오는 풍경을 바라본다.
93
쓴 사람도 읽는 사람도 동의하지 않을 원고를 이메일로 전송한다.
**홍보를 5년 했고, 많이는 아니지만 하루에 하나 이상의 보도자료를 작성했다. 누군가 읽기를 바라면서, 어떤 기자든 내 글을 실어주기를 바라면서.
쓸 때마다 생각한다. 이걸 누가 읽기는 할까. 읽고 도움을 받았다고 느낄까.
그래서 더욱 공감한다.
쓴 사람도 읽는 사람도 동의하지 않을 원고. 시간에 맞춰 발송하고, 메인에 뜨기를 바라면서 포털을 수없이 새로고침한다.
그 일상이 참 쓸데없다고 느껴질 때마다 동시에 자괴감도 들었다.
아이템을 내고, 스틸을 구성하고, 헤드를 잡고, 본문을 쓰면서 수많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 보도자료는 생각보다 더욱 하찮게 느껴졌다. 그래서 회사에 있는 것이 힘들었을수도 있다.
96
대체로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분량과 색깔의 불행을 가진 사람들을 아주 싫어한다.
**나와 같은 불행을 가진을 사람은 동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멀리하게 된다. 같은 처지의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위로를 받으면서도 어떤 경우에는 그 사람과 거리를 두고 싶다. 참 못된 심보다. 그 사람이 나아지면 부러워서 반대로 계속 힘들면 거울을 보는 거 같아서. 나를 보는 거 같아서 힘이 든다. 답답해서, 안타까워서. 대체로 불행한 사람들은 자신과 비슷한 불행을 가진 사람들을 싫어하기 보다는 애증이지 않을까.
부러운 마음도 안타까움에 답답한 마음도. 결국 나를 보는 것 같아서, 나와 연결 지어서 그런 거니까. 나를 시기해도 나를 답답해 해도 그를 미워하지는 말아야지.
105
여자의 입술은 생의 고통을 아직 모르는 어린 새의 부리처럼 명랑하다. 그 명랑한 부리는 윤미예의 입술을 닮았다. 결핍이나 내 살에 새겨지는 삶의 아픔을 아직 모르는 어린 새만이 가질 수 있는 입술. 러즈너블한 가격인지 아닌지 저울질하는 입술을, 목구멍을, 넘어가지 못하는 그들의 눈부신 고뇌.
**
티없이 맑은 사람이 있다. 어릴 적부터 많은 사랑을 받아서, 사람을 미워한 적도 미움을 받은 적도 없이 사랑스러움 그 자체인 사람.
소설 속 여자는 참 힘든 삶을 살고 있나보다. 명랑함.
명랑하는 그 표현이 마음이 아프다. 내내 그늘 안 서늘함에 떨고 있는 사람 같아서 그늘 밖으로 너무 뛰어나가고 싶은 사람 같아서 안쓰럽다.
106
내게 남겨진 건 사랑의 상처가 아니다. 내게 새겨진 건 사람이 준 상처이며 기록된 건 사랑이 아니라 환멸의 언어들이다. 나는 누군가가 내 영혼의 자기장 깊숙이 들어오기를 원하지 않는다. 사랑 속에는 사람들이 흔히 기대하는 따스함, 열정, 몰입, 기쁨, 까닭 없이 터뜨리는 웃음소리 같은 것만 있는 건 아니다. 그 눈부심 속으로 들어가 보면 마치 빙산의 아랫부분처럼 거짓과 권태와 배신과 차가움과 환멸 같은 것들이 수만 아래 덕지덕지 붙어 있는 것이다. 환멸조차 사랑의 일부분이란 걸 사람들은 모르고 있거나 잊어버리거나 한다. 나로서는 그 상처들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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