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독 도서

이승우_캉탕

사적인 기록 2023. 5. 18.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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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 소설은 참 좋다. 이번에 읽은 캉탕은 더욱 좋았다. 책의 크기도 좋았고, 짧은 그의 문장도 좋았다. 

P3
한중수의 친구이기도 한 정신과 의사 J는 그에게 긴 휴식을 제안했다. 하던 일을 그대로 두고 떠나라. 책상을 치우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몸을 일으켜라. 하지 않던 일을 하고 가지 않던 곳으로 가라. 
 
P16 
보려고 걷지 말 것. 쓸 것이 없으면 쓰지 말 것. 걷는다는 의식도 하지 말고 걸을 것. 
 
P18
나는 아무 데도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아무 데나 갈 수 있는 사람은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라 무능한 사람이다. 허용된 것이 아니라 내버려두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자유는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의 선택의 가능성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과 저것이 없거나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없을 때 선택의 가능성은 제거된다. 즉 자유가 없어진다. 벽의 존재가 벽을 넘을 자유를 보장한다. 벽이 없는 곳에서는 벽을 넘을 수 없다. 벽이 없으면 자유도 없고 능력도 없다. 벽이 수평의 땅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벽을 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내려버둠의 상태를 자유와 혼동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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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과 책임. 내버려둠. 선택. 
워싱턴 노숙 자매의 이야기를 접했다. 그녀들의 아버지는 하나 남은 아들은 고국에 남기고 자매를 입양보냈다. 그리고 소아성애자라고 추측되는 양부모와의 문제로 자매는 그들에게 빠져나와 거리를 떠돈다. 선택했지만 그들에게 진정한 자유가 주어졌을까. 그들 스스로가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본인들의 삶에 온전히 책임지고 있을까. 그들은 원체 버려졌다. 자수성가란 말이 있다. 스스로 일어난 사람들은 너무나도 훌륭하지만 나는 그 말이 썩 좋지는 않다. 각자 자신의 삶에 책임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하찮게 뭉게는 말 같다. 이것도 하나의 자격지심일수도 있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지만 사회에 언저리에 깔린 분위기다. 장기화된 전염병은 사람들을 더욱 피폐하고 극악하게 몰아간다. 요즘 자신이 집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사실은 집순이가 아닐수도 있다는 생각까지 한다고 하니.. 말했지. 멀리 퍼지고 싶은 건 모든 사람들의 욕망인가보다. 왜 이야기가 여기까지 나아갔지? 
아무튼. 자유와 책임. 내버려둠. 선택. 나 혼자 떠 안기에는 힘든 것 같다. 그 속에서 중심을 잡는 것. 그것도 어렵다. 어떻게 살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모르겠다. 예전에는 알 것 같았는데, 요즘은 갈피도 못 잡겠다. 
자유 책임 선택. 그래 차리리 캉탕 속 문장처럼. 쉽게 자유를 꿈꾼다고 하지 말아야겠다. 자유가 어떤 것인지. 진정으로 내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자유를 얻지 못하는 것 같다. 
 
P21
근사한 다름 세계를 향한 동경은 이 세계로의 귀환을 담보로 한다. 이 세계로의 귀환이 담보되어 있는 상태의 떠돎은, 그 시간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여행일 뿐이다. 여행자의 자유로움과 여유는 여행지에서의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보장되어 있는 귀환에서 비롯한다. 그렇지 않을 때 낯선 세계는 동경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 이 세계에서 상처를 입은 이도 이 세계에서 떨어지는 것을 겁낸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정도 애착자들이다. 
 
P33
이미지는 공간에 고착되지만 노래는 공간을 넘나든다. 
 
P36
그는 핍이 보고 싶었다. 바다에서 내린 후 다시는 배를 타지 않은 사내. 바다에서 내렸으므로 정박했고, 정박했으므로 바다에 타지 않은 남자. 
 
P39
그렇다면 고래는 신이 되려는 욕망을 가진 자를 유인하는 신화적 동물인 셈이다. 
 
P47
"되도록 멀리. 그래야 있었던 곳을 제대로 볼 수 있으니까. 되도록 낯설게. 그래야 낯익은 것들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까. 되도록 깊이. 그래야 다른 나와 만날 수 있으니까" J의 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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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라는 친구가 나도 있었으면 좋겠다. 나를 자꾸 깨어주는 사람. 조언과 충고가 아니라 그냥 나를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사람.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근데 그러기엔 내가 나 스스로도 못 움직인다. 그래서 위축된다. 내 생각을 강조하지 않고 멋있게 그렇게 그 사람을 일깨울 수 있는 한 마디의 말을 해 줄 수 있는 사람. 자꾸 말을 하면 참견하고 강요하게 된다. 너의 생각도 맞아, 그치만 나는 그래. 그런 말조차 얼마나 같잖은가. 
 
P50
말을 통해 자기가 누군가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은, 주로 직업적으로 말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착각이다...중략...서로는 서로의 무지를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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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공감이 가는 구절. 그리고 요즘 내가 인간관계에서 조심하고 싶어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동시에 상대방도 나의 이런 착각을 눈 감아준다면.. 그게 서로 간의 소통이라면.. 글쎄, 어떻게 해야할지
 
P66
와글거리는 사방의 눈을 피해 낯선 언어 속으로 들어간 사람은 모국어를 잊음으로써 과거를 잊는다. 잊기를 강요당한다, 잊기를 강요 당하기를 선택한다. 친숙한 모국어가 없는 곳에서 낯선 언어로 발언하는 사람은 다만 현재를, 현재 만을 산다. 낯선 것은 언제나 현재다. 순간으로서의 현재다. 낯선 것만이 순간으로서의 현재다. 낯익어지는 순간 과거가 된다. 낯익은 모든 것은 과거에 속한다. 
 
** 
낯선 것은 언제나 현재다. 위로가 되는 말이다. 현재는 낯선 것이니까. 내가 불안해하는 것도, 버거워하는 것도, 짜증이 나는 것도 전부 인정이 된다. 이유가 생긴다. 
 
P84
일기는 자기를 향해 쓴 기도이고, 기도는 신을 향해 쓴 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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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일기는 나를 향해 쓴 기도이다. 내가 전한 기도는 신을 향해 쓴 나의 일기이다. 
나에게 전하는 기도. 신에게 전하는 일기.
 
P131
더 이상 부인이 다시 일어날 거라는 소망없이, 오랫동안 괴롭혀왔던 그런 소망의 가혹함으로부터 이제 자유로워져서, 간절함도 애처로움도 없이 무덤덤하게 읽어내는, 감흥없는 목소리. 
 
P133
내 두 다리는 시계판 위의 바늘과 같다. 시침과 분침은 부단한, 힘겨운 움직임으로 시간을 밀어낸다. 시침과 분침이 멈추면 시계는 시간을 밀어내지 못한다. 시계는 시간을 밀어내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시침과 분침을 멈출 수 없다. 부단한 힘겨운 움직임의 결과는 무엇인가. 밀어내어 이르는 곳은 어디인가. 다른 도착의 자리는 없다. 번번이 떠났던 자리로 돌아오고 돌아온 자리에서 다시 떠난다. 시침과 분침은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 밀어내는 것이 아니다. 도착하려는 의지는 시곗바늘에게 없다. 그런 게 있다면 어딘가에 멈춰 설 것이다. 걷는 자의 다리에도 이 의지는 없다. 그저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뒤로 걷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앞을 향해 걷는다. 그런데 앞은 언제나 앞에 있다. 앞으로 가도 앞은 앞에 가 있다. 앞은 점령되지 않는다. 앞에 도착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걷는 사람의 걸음은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 없다. 땅을 밟고 떼는 두 다리에 의해 무엇인가가 밀려난다. 그뿐이다. 우리가 걸어서 거기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으면, 걸은 만큼 거기가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가 두 다리로 부단히 걸어 그 시간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부단한 걸음에 의해 그 시간이 우리에게 오는 것이다. 여섯 시간을 걸었다. 나는 오늘 여섯 시간만큼 나를 밀어낸 것이다. 
 
P148
흐르는 물에 두 번 발 담글 수 없다는 것은 만고의 진리. 그는 물이 안전한 것처럼, 내가 그에게 그런 것처럼 내게 안전하다. 
 
P166-7
현재는 과거가 제자리에 멈춰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멈춰 있는 것은 과거에 대한 현재의 기억, 혹은 짐작, 혹은 기대이다. 현재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과거는 움직이고, 자라고, 변하고, 그래서 몰라보게 달라진다. 현재를 삼킬 만큼 커지고 현재를 물어뜯을 만큼 날카로워진다. 현재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달라진다...중략...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달아났기 때문이고 짐작하지 못하는 것은 인정하지 않(으려 학)기 때문이다. 과거로부터 달아나는 것이 현재의 숙명이다. 과거로부터 달아나기를 원치 않는 현재는 없다...중략...
과거를 땅속에 묻었다고 안심하지 말라. 관뚜껑을 열고 나오는 과거는 더 사납다. 
 
P175
어떤 안전장치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는 자는 고백하는 동안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것이다. 그래서 말이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완전히 고백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는 자는 고백하는 자만이 아니다. 
 
P178
어렵게 말하는 사람에게 알아듣기 어렵게 말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렵게 말하는 사람은 쉽게 말하는 것이 어려운 사람일 뿐이다. 쉽게 말하는 사람의 거침없음이 그에게 없다. 이것은 정직성과는 다른 문제이다. 자기를 변호, 또는 보호해야 하고 타인의 반을을 예상, 또는 대비해야 하는 사람의 말은 직선일 수 없고 짧을 수 없다.  직선의, 짧은, 거침없는 문장은 권력자의 것이거나 바보의 것이다. 권력자나 바보는 고백을 모른다. 고백은 비밀을 가진 자의 문장인데 권력자와 바보에게는 비밀이 없기 때문이다. 
 
P210
그에게 걷는다는 것은 있을 곳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있는 곳을 떠나는 것이다. 현재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다. 존재를 버리는 것이다. 도피에도 열정이 필요하다. 아니, 도피야말로 열정이 필요하다. 걷지 않는 자는 안주하는 자다. 도망칠 이유가 없거나 이유에 대한 각정이 없는 자는 도망치지 않는다. 적응은 도피의 열정을 가지지 않은 자의 결말이다. 시인이 무엇으로부터 도망쳤고 도망치려 한 것인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런데 왜 그는 현재를, 있는 곳을, 존재를 떠나고 버리고 도망쳐야 했을까. 그것들이 왜 그렇게 끔찍했을까. 그것들이 왜 그렇게 끔찍했을까. 나는 상상한다. 형성에 대한 두려움, 고정된 어떤 형태가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거부, 그는 그가 이루어져가는 것을 못 견뎌한 것이 아닐까. 형태는 퇴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 존재의 찌꺼기들이 쌓이고 뭉쳐서 만들어지는 퇴적물, 그 덩어리의 끔찍함을 요동치는 정신은 견디지 못한다. 쌓이고 뭉치기 전에, 죽은 과거가 되기 전에 필사적으로 떠나야 했던 것이 아닐까.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 정신착란 상태에서 그는 자기를 배에 태워달라고 호소했다. "몇 시에 배에 탈 수 있는지 말해주세요" 그는 배에 올라타려고 한다. 그는 이제 지상이 아니라 저세상으로 건너가서 걸으려고 한다. 나는 상상한다. 그는 죽은 과거, 즉 퇴적 덩어리가 되지 않으려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여기저기로 끊임없이 걸었고, 그리고 저세상을 걷기 위해 아침내 이 세상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라고. 
 
P214
바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일까. 얼마나 많은 고백들이 저 견고한 침묵 속에 묻혀 있는 것일까. 바다가 저렇게 검푸르고 탕탕하고 깊고 아득한 것은 그 많은 사연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바다는 닫힌 페이지처럼 완고했다. 
 
 
이승우 작가는 흔들림이 없다. 곧고 명확하다. 동시에 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를 자꾸 움직이고 생각하고 고민하게 한다. 그래서 좋다. 캉탕은 한 번 더 읽어볼 것이다. 모비 딕도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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